봉익동 세면대막힘 배관막힘 복구 원인 과정 대응전략새 창 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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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익동 세면대막힘 배관막힘 복구 원인 과정 대응전략새 창 열림

괴랄한찐빵60 0 3

저자 : 김경민출판사 : 이마출판일 : 2017년 2월 1일​회사에 있는 서고를 둘러보다가 발견한 책입니다. 건축에 관한 지식은 전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공부해보고 싶은 분야라눈에 확 들어온 듯 합니다. ​제목부터 파란만장한 경성의 역사가 눈에 펼쳐질 것 같은 이 책은1920년대 경성에 대규모 한옥마을을 건설한 건축업자 정세권의 이야기입니다. ​현재 서울 최고 명물 중 하나인 북촌 한옥마을을 조성한 인물인데지금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북촌 외에도 많은 곳에 한옥단지를 건설했습니다. 한국의 건축문화사에 큰 기록을 남겼을 뿐 아니라 일제에 맞서 항일민족운동까지 참여했으니 역사에 남을 인물입니다. ​1920년대 경성은 인구가 급속히 증가했습니다. 1920년에 회사령이 철폐되어 회사 설립이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뀌었고그 후 수많은 일본인들이 경성에 회사와 공장을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지방에서 일제에게 봉익 하수구 토지를 빼앗긴 계층이 도시로 이주하며 경성을 채웠습니다. ​경성의 인구는 1920년 25만명에서 10년 후인 1930년에 39만명으로 56% 폭증,15년 후인 1935년에는 44만명으로 76%가 증가했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은 일본공사관이 있던 진고개 (현재 예장동에서 충무로 1가) 주변에 살았었는데1895년 청일전쟁 이후 경성 남부에 자리잡은 중국인들의 상권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일본인들이 점차 늘어나자 더 많은 땅이 필요했고청계천 북쪽인 북촌을 넘보게 됩니다. ​당시 복촌에는 대부분 조선인들이 살고 있었으나일제는 총독부를 경복궁 내로 이전, 정책적 차원에서 정부기관을 북촌의 옛 국공유지에 입지시키고 주변에 관사를 건설합니다. 자본력이 막강했던 일본인들의 진입을 한국인들이 막기 어려운 실정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정세권이 경성에 입성합니다. 정세권은 1888년생의 경남 고성 봉익 하수구 출신으로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서당에서 교육을 받았고어린 나이에 진주 백일장에서 장원을 한 수재였습니다. ​이후 진주 사범학교에서 신식 교육을 받고 3년 과정을 1년만에 졸업합니다. 23살에는 경남 고성군 하이면 면장으로 방품림 조성사업, 목화 대량생산, 주택 계량등의 사업을 진행했습니다. 정세권은 1919년 기미년 독립운동 이후 상경하여1920년 9월 9일에 건축회사인 건양사를 설립합니다. ​그는 북촌에 한옥 집단지구를 설립하는데100평짜리 한옥 한 채를 개량해 20평짜리 5개로 만들어 분양했습니다. 지금의 북촌 한옥마을이 이 때 조성되었습니다.이후 정세권은 삼청동, 가회동, 익선동, 봉익동, 혜화동, 성북동, 창신동, 서대문, 왕십리, 행당동 등지의 한옥집단지구를 탄생시켰습니다. ​그의 한옥집단지구가 다만 대규모여서 의미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건양사에서 지은 한옥은 전통 한옥이 아닌 도시형 봉익 하수구 개량 한옥입니다. '수도시설을 한옥 내부에 설치하고 부엌바닥에 타일을 깔거나 석탄 아궁이를 설치해 기존의 한옥이 가지고 있던 위생상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고, 햇빛이 잘 드는 남쪽 면을 넓게 설계하고 집 내부의 이동을 효율화하기 위해 방과 부엌 등의 공간을 위계를 고려해 집중적으로 배치했고, 식당, 세탁장, 하수구 등의 모두 물을 사용하는 인접해 편리했습니다.'P91​전통한옥이 한국의 유산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듯이 시대에 맞게 변화한 개량 한옥도 우리에게 귀중한 유산이니 현재 남아있는 서울의 한옥마을들은 살아있는 박물관인 셈이죠. ​게다가 정세권 같은 도시 디벨로퍼가 없었다면 막강한 자본력으로 경성을 장악했던 일본인들이서울의 심장부 대부분을 적산가옥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정세권은 부동산으로 쌓은 부를 항일민족운동에 투입했습니다.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조선물산장려회관을 봉익 하수구 사제로 건립하고 활동비의 6~70%를 지원했습니다. ​조선물산장려운동이 시들해지자 그는 조선어학회를 후원합니다. 하지만 조선어학회는 유난히 일제의 감시를 심하게 받았던지라함경도로 15일간 끌려가 고문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재산을 강탈당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어학회 동지들이 눈앞에서 고문받는 거를 보고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대요. 고문이라도 덜 받게 하려면 일제가 원하는 대로 재산을 줄 수밖에 없었대요.'P172​1940년 11월 20일 일제가 [택지건물등가격통제령]을 발표한 이후 모든 택지와 건물 가격은 1939년 9월 18일 기준으로 동결됩니다. 이로 인해 주택시장은 심각하게 위축되었고 정세권의 사업도 차질이 생깁니다. 게다가 정세권은 조선총독부의 감시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더욱 사세가 기울었습니다. ​1942년 11월과 1943년 6월에 두 차례에 봉익 하수구 걸쳐 옥고를 치른 후 현재의 성동구 자양동 일대의 토지 3만 5천평을 일제에 강탈당합니다. 1945년 해방이후에는 일가 친족들과 행당동에 거주했는데 한국전쟁 당시 비행기 폭격으로 다리에 파편이 박히는 큰 중상을 입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고향(경남 고성군)과 서울을 오가며 주택 및 공동체 개발에 힘쓰다가1965년 9월 14일, 향년 78세로 생을 마감합니다. ​이 정도 내용이면 어느 방송인가에 나왔겠구나 하고 검색했더니역시나 ;에 나왔네요. 여러모로 영상콘텐츠로 만들기에 좋은 내용 같고 근사한 영화로 제작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건축 소재라 제작비가 많이 들겠지만요. ​나이가 들수록 한옥의 색깔이 주는 고즈넉함과 편안함이 좋아집니다. 아이를 데리고 지방 이곳저곳을 여행하면서 성읍, 고택 등 옛날 건축물들이 있는 곳들은 꼭 들러봤는데날씨 좋을 때 북촌 나들이도 한 번 다녀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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